전통은 낡았다는 편견, MZ세대 디자이너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패션 브랜드 ‘소새(SOSAE)’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인 박지수 씨(29)는 대학 시절 우연히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았다가 전통문양의 매력에 빠졌다. 그가 말하길, “전통은 늘 박물관 안에만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쁘지만 오래된 것, 의미는 있지만 요즘 감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문양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니 색이 너무 세련된 거예요. 그때 처음 ‘이걸 요즘 옷에 입히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통문양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지수 씨처럼 요즘의 2030 디자이너들은 전통문양을 ‘소재’가 아니라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단순히 패턴 요소로 참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그 문양이 담고 있는 의미나 맥락을 디자인의 서사로 가져오는 시도들이 많아졌다. 특히 연화문(蓮花紋)이나 보상화문(寶相華紋), 당초문(唐草紋)처럼 곡선미가 살아 있는 문양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패션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전통이 낡았다는 인식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감각을 건드리는 자극이 되고 있다.
원단 위에 새긴 문양, 감성에서 철학으로
디자이너 이가현(31)은 패션 브랜드 ‘담결(DAMGYEOL)’에서 2022년 봄 컬렉션을 기획하며 전통문양을 주제로 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가 선택한 문양은 ‘구름문’과 ‘기와문’이었다. 처음엔 패턴이 가진 시각적 아름다움에 끌렸지만, 디자인 과정이 깊어질수록 문양의 철학적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와무늬는 그냥 반복되는 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질서와 보호의 의미가 담겨 있더라고요. 구름문도 단순한 곡선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순환을 상징해요. 그걸 옷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다 보니, 단순히 프린트만 하는 게 아니라 옷의 실루엣과 구조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더라고요.”
그의 말처럼, 전통문양은 이제 패션에서 ‘무늬’ 이상의 역할을 한다. 하나의 문양은 한 시대의 미학이자 철학이다. 이가현은 구름문을 활용해 만든 셔츠에 흐르는 듯한 곡선을 패턴에만 담지 않고, 실제 옷의 절개선에도 적용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옷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패션이 단지 외형의 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감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디지털과 전통이 만날 때, 문양은 살아 움직인다
2030 세대 디자이너들이 전통문양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된 데에는 디지털 도구의 발전이 크게 작용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Procreate, Illustrator, CLO3D 같은 툴을 이용해 전통 문양을 스캔하거나 벡터화한 뒤,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한다. 디자이너 김도윤(27)은 패턴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요즘은 디지털 환경에서 전통문양을 3D 의상 시뮬레이션에 바로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상상한 대로 옷에 적용해볼 수 있어요. 예전처럼 시제품 제작에 돈과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아서, 더 실험적인 문양 활용이 가능해졌죠.”라고 말한다.
그는 단청의 팔각 연화문을 3D 모델링 도구로 재해석해, ‘움직이는 패턴’으로 만들어낸 후 블라우스와 후디에 적용했다. 이 작업은 실제 2030세대에게 높은 호응을 얻었고, SNS에서 ‘디지털로 구현된 전통’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전통을 현대 기술로 옮기는 방식은 이제 선택이 아닌 표현의 확장이 되었다. 문양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시대, 전통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전통을 현재의 미디어로 옮기는 중이다.
디지털 기술은 전통 문양을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AR(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해 전통 문양이 옷 위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이거나 색이 변하는 실험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이제 과거의 유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에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창작자가 된 셈이다. 전통이 디지털을 통해 감각적으로 번역되는 지금, 문양은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단순한 시각적 변화를 넘어서, 사용자와 문양 사이에 감정적 연결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사용자의 움직임에 따라 전통 패턴이 천천히 확장되거나, 특정 시간대에 맞춰 색이 변하는 옷은 보는 사람에게도 ‘이 문양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전통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그릇을 만나 오히려 더 인간적인 감각을 되찾고 있다. 문양이 담고 있던 상징성과 정서가, 이제는 빛과 소리, 움직임으로 다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패션이라는 언어로 말하는 ‘우리 것’의 가치
디자이너들이 전통문양을 패션에 담는 이유는 단지 ‘멋’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과 문화적 맥락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다. 박지수는 “전통문양을 옷에 담는 건 결국, 나의 문화적 배경을 재해석해서 보여주는 일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디자이너로서 제 옷에는 그 정체성이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2023년 파리 디자인 위크에서는 전통 문양을 활용한 한국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해외 관객의 큰 관심을 끌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문양 하나만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옷은 ‘감성의 언어’가 되었다. 해외 관객들은 “이게 한국적인 것이구나”라는 인상을 받으며 전통에 대한 인식을 넓혀간다.
전통문양은 이제 그 자체로 강력한 문화 콘텐츠다. 그리고 그 콘텐츠를 입히는 매체로서 패션은 가장 감각적이고 대중적인 수단이 된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통을 다시 쓰고 있고, 우리만의 문양이 세계의 거리 위에서 ‘우리의 감각’으로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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